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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에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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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많은 투수들이 이름을 올렸지만

그 중의 제일은 선동열과 최동원, 최동원과 선동열일 것이다.

 

어떤이는 조정방어율이나 구위, 주량으로 선동열이 낫다고도 하고

어떤이는 믿을 수 없는 완투능력 및 강견, 고스톱 실력으로 최동원이 낫다고 하지만

 

누군가가 어떤 타자 앞에서도 당당하게 묵직한 돌직구를 뿌려대는 그들의 공을 직접 봤다면

그도 나처럼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뛸 것이다.

 

기록으로만 가지고 말할 수 없는 레전드

 

나에게 두 사람의 이름은 가슴을 뛰게하는 바로 그 레전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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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후기리그부터 데뷔한 선동열은 차근차근 그의 선배, 최동원이 이룩한 기록을 하나둘씩 갈아치우고 있었다.

 

1987년 5월, 드디어 선동열과 최동원은 그들의 마지막 대결을 준비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1승 1패 호각 지세...

누가 낫다고 이야기할 수 없고 누가 못하다고 이야기할 수 없는 힘대힘의 승부

 

경기 초반 제구력의 난조를 보인 선동열은 2회 2점을 먼저 주게 되지만 

바로 1점을 해태가 따라가서 2:1 상황..

선동열은 이후 3회부터 8회까지 모두 삼자범퇴로 이닝을 차근차근 먹어갔고

최동원도 사상 최강의 해태타선(김성한, 한대화, 김종모, 장채근, 김봉연, 이순철, 서정환, 송일섭 등)을 잘 틀어막고 있었다.

9회초 최동원의 승리로 끝나갈 무렵 한대화, 김일환의 연속 안타로 해태는 1점을 추가하여 상황은 2:2

 

양팀 모두 절체절명의 상황, 여기에서 투수를 바꿀 수는 없었다. 

정규 방송 관계로 중계를 중단하던 TV방송도 이날만큼은 이들의 경기를 멈출 수는 없었다.

 

지속적인 대타작전으로 양팀 모두 주전이 교체되고 심지어 해태는 포수마저 내야수인 백인호가 맡고 있는 상황.

롯데도 만만치 않은 출혈...

 

이날 경기는 15회 2:2 무승부로 선발 완투 경기라는 진기록을 남기며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명승부로 꼽히고 있다.

또한 이때 기록한 양팀 선발 투구수 441개 (선동열 232개, 최동원 209개)는 아직까지 깨어지지 않는 기록이며 

개인 최다 투구수에서도 나란히 1,2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후 이 둘의 맞대결은 단 한차례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여전히 1승 1무 1패로 호각지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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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에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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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출처 : 구 스탯티즈)


1984년 패넌트리그 27승, 한국시리즈 4승. 도합 31승의 사나이 최동원

단, 한사람의 힘으로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최동원

 

져주기로 롯데를 한국시리즈 파트너로 고른 삼성도 후기리그에 무려 18승을 올리며 당대 최고의 투수임을 과시하였으며 특히 단기전에서는 패배의 경험이 없는 승부욕의 상징이기도 한 최동원만은 무서운 상대였다.

 

롯데는 1선발 최동원 외에는 마땅한 대안이 없어 무조건 최동원만을 믿어야 하는 상황

 

1차전 : 삼성은 당시 최동원의 라이벌이던 김시진을 등판시켜 정면승부하였으나 4:0 최동원의 완봉승

 

2차전 : 김일융의 노련한 피칭에 롯데 타자는 단  5안타를 치는데 만족하였다. 8:2 삼성의 승리

 

3차전 : 다시 맞붙은 최동원과 김시진, 두 투수 모두 역투를 펼치지만 2:2 상황에서 

홍문종의 타구에 다리에 부상을 입은 김시진이 강판되면서 등판한 권영호가 끝내기 안타를 맞으며

최동원의 3:2 승리

 

4차전 : 말할 필요없는 삼성의 완승, 선발 김일융은 8회까지 무실점으로 삼성의 7:0승리

5차전 : 2:2 상황에서 대타 홈런을 허용한 최동원, 그러나 롯데타자는 2점이 삼성 투수진에게서 

뽑아낼 수 있는 최대 점수였다... 최동원의 2:3 완투패

이제 세 경기 완투를 한 최동원은 6차전에 현실적으로 등판이 불가능한 상황이라 삼성은 마치 우승한 것처럼 기뻐했다.

 

6차전 : 그러나 국가대표 출신 롯데 No2. 임호균이 해낼 줄은 아무도 몰랐다. 초강력 삼성 타선을 4이닝 1실점으로 막아내었다. 그리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최동원의 5회 등판.

그리고 무실점 구원승. 

 

7차전 : 또다시 최동원 선발 등판. 그러나 그도 사람이었다. 9회 10안타를 맞으며 4실점.

상대 투수도 역시 연투에 지친 김일융.

8회말 롯데는 역전에 성공하며 최동원은 4승째를 거둔다.

 

1984년.. 처음부터 끝까지 최동원 씨리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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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에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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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했고 그 해 잠실야구장 개장 행사로 개최한 세계 야구선수권 대회에서

선동열 선수의 미국전 15탈삼진 승리 및 결승전 완투승,

김재박 선수의 개구리 번트, 한대화 선수의 역전 3점 홈런으로 한국은 처음이자 마지막 우승을 하게 된다.

 

이때의 주역은 대학 1년생인 선동열을 필두로

최동원과 김시진, 임호균, 김재박, 이해창, 유두열, 장효조, 한대화 등이었다.

그중 대학생이었던 선동열을 제외하고  대부분 프로 구단에 입단하게 된다.

(사실 대부분 이미 82년에 합류했어야 하는 선수들이지만

세계선수권대회를 대비하기 위해 실업과 군에서 잡아두고 있었다.)

 

세계 야구 선수권 대회 우승으로 프로 야구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을 무렵

최동원 선수는 전년도 5위팀 롯데에 입단하게 되는데 입단 첫해 총 38경기에 등판해서 9승 16패 4세이브 (방어율 2.89)라는 기대에 걸맞지 않은 성적표를 받게 되나

이는 당시 롯데(83년 시즌 최하위)의 전력이 완전하지 않아서 승운이 없었을 뿐

방어율로만 보자면 실제 그 해 우승팀인 해태 에이스 이상윤(20승 10패 6세이브 방어율 2.67)이나 김용남과 비슷한 수준의 훌륭한 데뷔 시즌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1984년 시즌...

전년도가 장명부의 해였다고 하면 1984년은 최동원의 해였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전기리그에 롯데는 4위에 그쳤지만 후기리그에서 1위에 오르게되는데 이는 전적으로 최동원의 힘이었다.

총 100경기 중 51경기 출장에 27승 13패 6세이브 방어율 2.40

롯데가 전후기 거둔 모든 승수 50승의 66%(27승+6세이브)를 최동원이라는 한 사람이 거둔 성과였다.

 

그리고 시작된 코리안 씨리즈 

삼성은 김시진, 김일융, 황규봉 등 막강 원투쓰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타력면에서도  최초의 트리플 크라운 이만수, 장효조 등 막강화력까지 가지고 있었지만 만만하리라 생각하고 선택했던 롯데의 최동원에게 4승을 헌납하며 분루를 삼키게 된다.

 

패넌트리그 27승 6세이브로 팀 승리의 66%

코리안씨리즈 4승로 팀 승리의 100%

 

이게 바로 최동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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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이라 현 시점에서는 안맞는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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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29시즌 동안 단 한번도 약체로 분류된 적이 없고 언제나 우승후보인 최고의 강팀.

비록 우승 경험은 타이거즈(9+1)에 비해 턱없이 적지만 단 한번도 리그 최하위를 차지한 적이 없었다.

 

프로 원년 역시 강력한 우승후보였으며 그에 걸맞게 전기 2위, 후기 1위를 차지하며 코리안 시리즈에 진출한다.

 

패넌트 리그에서의 객관적인 전력은 박철순(24승)의 OB가 우세했지만 

박철순은 무리한 등판으로 코리안 시리즈 등판이 사실상 어려운 상태로

강력한 1-2-3 (이선희, 황규봉, 권영호 모두 15승)를 가지고 있던 삼성의 낙승이 예상되었다.

 

그러나 첫 승부에서 15회까지 가는 접전 끝에 무승부로 끝나면서

삼성은 투수자원을 대부분 고갈하였으며 이후 이선희에 의존하는 투수 운영을 하게 된다.

 

등판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박철순은 3차전 이후 전 경기 등판하게 되고

3차전에서 조범현(현 기아 감독)으로부터 포수마스크를 이어받은 김경문(현 두산 감독)의 맹활약으로 OB의 승리,

이후 매 경기 박철순과 이선희의 대결이 계속 되었으나 탁월한 경기 운영의 박철순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운명의 6차전 

이선희는 끝내 김유동에게 만루홈런을 얻어맞으며 패전투수가 되었고

패넌트 리그 개막전과 포스트 시즌 마지막 만루홈런을 맞은 진기록 및

포스트 시즌 전 경기 등판 투수라는 진기록을 가지게 된다.

 

이 시리즈 이후 박철순은 기나긴 재활 기간을 거치게 되고

아마츄어 시절 최강의 투수였던 이선희는 이렇다할 성적을 못내며 잊혀진다.

 

또한 삼성라이온즈는 이후 2002년까지 20년동안 한국시리즈 우승을 하지 못한다.

(1985년 전후기 통합 우승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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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팀으로 거론되던 금호가 창단을 거부하면서

출범위원이었던 김동엽씨가 해태 회장 박건배씨를 만나 담판을 지어

해태에서 호남팀을 창단하게 된다.

 

그러나 너무나 급작스럽게 팀을 창단하는 바람에

감독, 코치, 선수도 구성되어 있지 않은 상태여서

김동엽씨를 초대 감독으로 하고

김동엽씨의 아마츄어 롯데 시절 스태프로 있던 조창호씨와 유남호씨를 

영입하는 등 코칭스태프를 구성한 다음

호남출신 선수들을 소집했지만 군산상고 출신을 주축으로 한 14명에 불과했다.

당시 대학생이던 방수원씨와 이상윤씨를 중퇴시키고

합류시켰지만 창단식에는 16명의 선수만이 참석했다.

 

개막전까지 각 구단에서 남는 선수들을 끌어모으고 

고등학교 선배 김봉연의 부탁으로 대표팀에서 탈출 하여 합류한 김일권 등으로 겨우 엔트리를 맞춰 개막하게된다.


하지만.

 

김동엽씨의 강압적인 훈련방식에 코치진 이하 선수단은 대거 반발하고

김동엽씨는 감독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후 조창호씨를 수석코치 겸 감독대행으로 시즌을 끌고가게 된다.

 

비록 선수단은 빈약했지만 선수 개개인은 아마시절 스타플레이어들이 대부분이라

김봉연(홈런1위 타율4위 타점 4위), 

김성한(타점 1위 홈런 4위 타율 10위 다승 7위 방어율 6위),

김일권(도루 1위), 

김준환(홈런 2위, 타점 10위, 타율 11위),

김종모(타율 13위, 타점 11위, 홈런 12위) 등의 활약 덕분에 통합 4위로 마무리하게된다.

 

그리고 시즌오프 기간 중에 아마추어 최고의 강타자 출신이며 한일은행 감독 김응용씨를 감독으로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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